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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사이언스의 창으로 혁신 담론 성찰하기: 키워드의 '신기루'를 넘어서

데이터 사이언스의 창으로 혁신 담론 성찰하기
: 키워드의 '신기루'를 넘어서

7월 14, 2019 | BY 김도훈

기술이 격변하고 있다는 말은 우리 시대에 진부해졌다. 그런 표현은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세상의 변동을 담아내기에는 뭔가 중요한 핵심을 놓치고 있다. ‘4차산업혁명’은 또 어떠한가? 무언가 혁명적일 만큼 대규모로 급변한다는 느낌 말고, 그 단어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 있는 진실을 전달하고 있을까?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는 홈페이지에서 “역사적으로 돌이켜 보면, 우리는 범용기술에 의해 3차례의 산업혁명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AI(인공지능), 빅데이터 등 지능정보 기술로 촉발된 새로운 세상,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라고 본인들의 포부를 밝힌다.

의문이 남는다. ‘지능정보’란 무엇일까? 명확하게 기술된 개념 정의는 없지만 4차산업혁명위원회 홈페이지의 <과학기술, 그리고 4차산업혁명 시대> 제목의 게시글에서 그 의미의 단초를 찾을 수 있는 듯하다. 게시글에는 지능화기술 경쟁력 확보를 위해 ‘기초기술(산업수학, 뇌과학 등) 활용, 지능화 기술(AI, 컴퓨팅, 데이터 등) 고도화와 이를 바탕으로 융합이 확산되는 선순환 구축’을 정책 목표로 내걸고 있다. 아울러 혁신성장동력 연계 육성을 위해 ‘AI, 차세대통신, 자율주행차, 스마트시티 등을 집중 지원’할 방침이라고 밝힌다. 정리해 보면, 4차산업혁명은 산업수학, 뇌과학 등의 기초기술을 활용하여 데이터 처리와 관련된 기술을 고도화 하는 것이 ‘지능화 기술’의 비전이고, 이를 통해 연계되는 신산업을 육성하겠다는 정부 중심의 산업 전략으로 읽힌다.

다수의 남성 엔지니어들이 참여하는 것으로 알려진 온라인 백과사전 사이트 <나무위키>에서는 정부의 비전과 비슷한 이미지를 공유하면서도 해당 용어에 대한 뉘앙스가 사뭇 다르다. <나무위키>에서는 4차산업혁명의 개념에 대해 “… (전략) 대체로 기계학습과 인공지능의 발달이 주요 수단으로 꼽힌다… (중략) 산업혁명이라는 표현이 정말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는데, 18세기 산업혁명 수준이나 그 이상의 생산 효율 증가가 예견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거 기계 한 대가 노동자 수백 명을 대체했듯이 이번에는 프로그램 하나, 컴퓨터 한 대가 수백, 또는 수십만 명의 전문 인력을 대체할 수 있게 된다”고 전망한다. 아울러 비약적인 생산성 증가 못지 않게 독과점, 기술적 실업, 알고리즘으로서 인공지능의 윤리 등 문제에 직면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이해관계자에 따라 기술의 변화, 혁신, 미래상은 사뭇 다르게 나타난다. 우리가 체감하는 변동상에 대한 개념과 전망이 뚜렷하게 정립되지 않은 가운데, 새로운 디지털 산업에 대한 예측과 투자 전략에 대한 보고서는 방대하게 양산되고 있다. 이미 ‘지능화기술’의 일단인 데이터 사이언스 기법을 통해서도 유의미한 기술 변동상과 의미 프레임이 새롭게 읽혀지고 있다.

2019년 1월에 발간된 정보화진흥원의 <데이터 인사이트> 보고서를 통해서도, 언론 기사의 프레임에 따라 어떤 기술이 향후 집중적인 조명을 받을 것인지에 대해 가늠해 볼 수 있다(<그림 1>). 2018년부터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는 트랜드를 종합적으로 분석해 보면, 데이터와 플랫폼이 미래 기술 발전을 추동하는 가장 중요한 매개로 도출되긴 하지만 정작 쓸 수 있는 데이터는 부족하거나 법제도의 미비 등으로 인해 공유/활용이 가로막혀 있고, 자주 활용되는 유용한 플랫폼은 대부분 해외의 공급자가 독점적으로 제공하고 있는 실정이다. 데이터와 플랫폼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서비스와 시장이 구글, 아마존(AWS), 우버 등 극소수의 해외 공급 업체에 의해 독점적으로 장악되면서, 의존도가 점증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이런 글로벌 (독점) 플랫폼 자본주의의 파고가 시사하는 함의는 무엇일까? 혹자는 대한민국의 지정학적 환경, 언어(영어) 장벽, 미약한 지식산업 생태계 등으로 인해 4차산업혁명, 혹은 데이터 처리의 고도화에 대한 국가적 비전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서비스 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이 경쟁력과 지분을 확보하기에는 현실적인 난관이 많은 것으로 진단한다(KISTEP, 2017). 그런 비관적인 잠재의식이 깔려 있어서인지, 최근 활발히 논의되는 또다른 아이템인 ‘스마트시티’(smart city)는 모든 신기술이 집적된 문명의 총아이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신기루처럼 논의된다. 2017년 1월부터 2019년 상반기(6월 말일)까지 네이버 포털 뉴스(약 600건)에서 ‘스마트시티’를 다룬 기사들을 의미망 분석해 보면, 해당 키워드는 건설 및 연관 기업들이 주로 아파트 위주로 조성할 스마트시티의 단지 내의 빅데이터 및 IoT 인프라 기술을 통해 서비스 수요를 창출하기 위한 전략으로 읽힌다(<그림 2> 참고). 그러나 스마트시티가 결국 사람들이 미래에 살 환경을 그리는 것이라면, 산업과 경쟁력을 논하기에 앞서 사람들이 원하는 현재와 미래의 욕구가 무엇인지부터 되짚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출처: 아르스 프락시아

그런 면에서 엠아이티 테크 리뷰(MIT Tech Review), 와이어드(Wired), 퓨쳐스(Futures) 등 해외의 미래 기술 전문 매체들이 똑같은 ‘스마트시티’를 어떻게  다르게 프레임화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어 보인다. <그림 3>은 동 기간 영어권 매체의 스마트 시티 관련 핵심 스토리 구조를 데이터 사이언스 기법을 통해 도해화 한 것이다. 전반적으로, 구글, 페이스북, 우버 등 첨단 미국 기업들이 강조된다는 점에서 한국과 마찬가지로 기업 중심 프레임이 두드러진 것으로 보인다. 단, 기업이 공급하는 기술 및 서비스가 사람([people])의 삶([life])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자 하며, 도시([city])에게 기대되는 기능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의하는 지점은 영어권 매체가 한국 언론보다 한결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해당 논의에서 스마트시티가 사람들에게 보다 심화된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하는 내용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인터넷의 교육적 활용성 극대화를 통해 디지털 격차를 해소하는 등, 학습 역량 진작을 위한 활동이다. 둘째는, 도시 내 아파트 등 빌딩 건설에 더해서 자동주차, 자율주행 등 새로운 미래 기술을 활용하여 모빌리티를 효율화하는 것이다. 전자의 논의가 디지털 사회의 ‘교육’을 강조한다면, 후자는 모빌리티의 효율화를 위한 법제도 정비의 필요성 역시 일깨운다. 그러나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도시에서 삶을 영위할 인간이다.

 

출처: 아르스 프락시아

양승훈은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에서 거제도 중공업 가족들의 실제적인 삶을 조명한다. 한때 대한민국의 산업을 이끌었지만 사양길로 들어선 조선업계의 의사결정권자들이, 새로운 하이테크 먹거리 산업으로 지목한 해양플랜트를 어떻게 인식하고 사업 수주에 뛰어들었는지에 대해서도 생생하게 묘사한다. 산업계 리더와 정책 당국자들에게, 해양플랜트는 중국과의 경쟁 등으로 인해 수익율이 하락하기 시작한 기존 조선업에서 갈아타야 할 또 하나의 산업 아이템이었다. 상대적으로 저임인 노동력을 고도로 훈련시키거나 대량의 외주를 통해서 노동과 자본을 집중시키는 방식으로 투자를 했지만, 해외 공급선과의 불안정한 수급 관계, 새로운 기술을 단지 보다 큰 스케일의 ‘조립’으로만 인식한 경영진, 독자적인 설계 역량 없이 임금 후려치기로 수지를 맞추는 환경에서 축적되지 못한 엔지니어링의 암묵지 등으로 인해 해양플랜트 사업은 큰 손실을 냈고, 수십년 역사의 중공업 기업과 가족들을 위기의 나락으로 내몰았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정동 역시 <축적의 시간>에서 개념설계(concept design) 역량과 원천기술 축적을 위한 시간(투자)의 부재를 한국 산업과 기술의 치명적인 아킬레스 건으로 지목한다.

이 책 전반을 통틀어 또 하나의 문제의식을 얹는다면, 4차산업혁명 등 작금의 기술 중심적인 시대 담론은 새로운 기술을 향유하거나 변화를 겪을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크게 부족하다(정부 주도의 ‘산업혁명’은 정작 사회 구성원들의 우려를 살피지도, 그들로부터 혁명적 열정을 이끌어 내는데도 실패하고 있는 것이 아닐지!). 기술 격변의 사회상 속에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기계(인공지능), 기계와 기계가 어떻게 관계를 재편해 나가야 할지에 대한 성찰이 부재하다면, 대한민국의 행위자들은 데이터와 인공지능 시대 플랫폼을 관장하는 규칙으로부터 소외된 채 기껏해야 껍데기의 물건만 생산하고 소비하는데 만족해야 하게 될지도 모른다. 혹은 더 큰 갈등의 불씨만 떠안은 채…

근래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유통되는 공허한 키워드는 또 있다. 바로 ‘혁신’이다. 그 말은 급격한 변화에 대한 적응의 시급성을 일깨울지언정, 정확히 기존의 무엇을 바꾸어야 할지에 대한 지침을 주지 못하고 있다. 단지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뭔가 새로운 걸 해보라고 채근할 뿐이다. 그러나 최근 공유 택시 서비스 등에서 불거진 사회적 갈등에서 목도하듯, ‘관계’와 ‘공존’을 도외시한 새로운 사업 아이템은 그 자체로 혁신의 보증수표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사회 혁신을 위한 생태계와 잠재력을 파괴할 수도 있다.

과연 요즘 사람들은 ‘혁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대중 미디어는 어떻게 해야 혁신을 할 수 있다고 설파하고 있을까? 한국의 혁신 담론은 외부의 관점과는 또 어떻게 다를까 ? <그림 4>는 2019년 상반기(1월-6월) 한국의 경제신문(한국경제, 매일경제신문)과 미국 일간지(NYT, WSJ, WP) 경제 지면의 프레임을 키워드 분석을 통해 시각화한 것이다. 각 국가별로 좌측은 키워드의 빈도수를, 우측은 의미 네트워크의 잠재 영향력 지표(potential boundary spanner) 값을 키워드의 크기에 반영했다.

출처: 아르스 프락시아

두 국가간의 중요한 차이를 비교해 보자면, 한국에서 혁신은 기업과 정부가 중심(좌측 상단)적인 역할을 함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기술’과 ‘성장’이 강조되고, ‘회장’이라는 키워드도 지면에 자주 등장한다. 전체 담론 상에서 잠재적으로 가장 중요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키워드는 ‘품질’(우측 상단)이다. (기술의) ‘보유’, ‘제품’ 등의 키워드도 중요하게 도출된다.

미국의 매체들이 혁신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는 ‘cofounder’(좌측 상단)이다. 창업자, 그리고 공동창업자의 역할이 강조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많이 언급된 단어는 ‘school’이다. 학교가 종종 혁신의 촉발을 위한 경험과 모임의 장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잠재적으로 강조된 가장 키워드는 ‘design’이다. 영어 단어 디자인(design)은 다양한 맥락으로 쓰인다. 단순한 제품의 디자인 뿐만 아니라, 프로젝트, 사회적 비전 모두 디자인의 대상이다. 그 다음으론 ‘professor’, ‘head’ 등의 주체가 중요하게 언급되었다.

언뜻 보아도 한국과 미국은 혁신을 추동하는 주체와 주요 관심사가 달라 보인다. 한국이 회장이 소유한 (대)기업과 정부를 중심으로 경제성장을 위한 고품질의 새로운 제품 생산에 관심이 있다면, 미국은 새로운 창업자들이 지적 경험을 공유하면서 새로운 생태계를 디자인해 나가고 있는 풍경이라고나 할까. 물론 각 국가는 고유의 역사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그 맥락에 맞는 가치와 전략을 추구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단순한 과거의 경로의존성에서 벗어나, 무엇이 더 가치있는 방향인지에 대해 사고할 수 있는 주체의 역량과, 변화를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의 조성일 것이다. ‘인공지능’, ‘스마트시티’ 등 키워드가 범람하는 작금의 숨가쁜 현실 속에서 사회의 변화상이 갖는 의미에 대해 보다 깊이 천착할 필요가 있다.

스티글러(Bernard Stiegler)는 <자동화사회>에서 근미래 사회의 모습을 새로운 미디어와 인공지능의 조응 속에 인간 자아가 그램(gram) 단위의 파편화된 전자 정보로 연결되어 새로운 여론과 의식의 흐름을 이루면서 근대 사회와는 또다른 형태의 통치성과 노동이 출현하는 과도기로 묘사한다. 우리 사회는 그 흐름 속으로 이미 들어선 듯하다. 그 거대한 흐름을 타면서, 관성화된 웅성거림에 빠져드는 것보단 문득 멈추어 설 수 있는 지적 결연함이 필요한 시점인지도 모르겠다. 전환기 사회-기술의 방향을 보다 면밀히 응시하면서, 기존 권력-자본-담론의 소용돌이 바깥에 놓여질 인간을 상상할 수 있는 통찰이 필요하다.

 

 


Leo Kim ARS Praxia CEO
leo_kim@arspraxi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