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적인 사회를 위한 시스템 변혁이 필요하다
지성적인 사회를 위한 시스템 변혁이 필요하다
6월 8, 2022 | BY 김도훈
지식의 오용과 과학 거버넌스의 실패
사무실 창밖 광장에서 촛불의 함성이 들려오던 2017년 1월의 어느 날이었다. 정부 출연 연구소의 연구원이 불쑥 정책연구과제를 회사에 의뢰했다. 내막을 알고 보니 이전 정부의 관료들이 새롭게 선출될 대선 캠프에 어필할 과학기술 정책 어젠다를 찾고자 출연연에 먼저 의뢰를 한 것이었다. 빅데이터로 트렌드를 분석해보니 박근혜 정부가 획일적으로 추진한 중소기업 지원 및 산학협력 정책이 전반적으로 효과를 거두지 못했고, 여론의 관심에서도 멀어지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론, 과학기술 지식이 지역 사회에 기여할 여지가 근미래에 점증할 가능성도 발견했다. 자체적으로 구성한 전문가 패널의 토의를 통해 영미 학계를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던 ‘사회혁신’(social innovation) 논의가 과학 및 기술 생태계의 자율적 발전을 위해 한국에서도 중요한 어젠다가 될 수 있다고 생각을 모았다.
해당 부처에서 중간보고를 받은 당시 실무자는 비교적 젊은 서기관이었는데, 보고 내용이 무척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교수와 전문가들이 배석한 회의 자리를 박차고 나가더니 발표 중이던 프로젝트 매니저를 바깥으로 불러냈다. 어젠다 발굴하랬더니 이게 뭐 하는 짓이냐며 한참 화를 내다 옆에서 서기관을 따라다니던 출연연 박사에게 냉소적인 태도로 ‘프로젝트 다시 하고 업체를 잘 가르치라’는 한마디를 던지고 홀연히 사라졌다. 짐작하건대 온갖 장표로 각론을 장황하게 나열하면서 일을 열심히 한 척하는 업무 방식에 길들여져 있을 뿐 아니라, 스스로도 그게 제대로 일을 하는 것이라는 확신이 몸에 배어 있는 것 같았다. 한 자리에 있던 출연연의 박사도 무례한 태도가 체화되어 있었는데, 곤혹스러움과 의기양양함이 반반씩 섞인 몸짓으로 “아 그러게 이 자리에서 윗분들의 정책이 효과를 못 거뒀다는 소릴 왜 하세요. 거기서부터 서기관님 기분이 상했잖아. 그리고 사회혁신은 또 뭐에요. 여긴 과학기술을 얘기해야지, 공대도 아닌 저 사람들은 뭘 안다고 여길 온 거에요?”라고 핀잔을 주었다.
당시 그런 당황스런 경험에 직면했던 프로젝트 매니저는 바로 필자였는데, 불과 몇 개월 뒤 사회혁신의 어젠다는 여러 경로를 통해 새 정부가 추구할 과학기술 정책의 핵심적인 시작점이 되었다. 새 정부가 출범한 지 얼마 안 되어 과학기술부가 주최한 <사회혁신을 위한 과학기술정책> 회의에 토론자로 초청되어 부처의 구상과 로드맵에 대한 발표를 들었다. 과학 지식의 성숙과 기술적 발전은 단순한 양적 투자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과학 지식을 생산하고 활용하는 행위자의 실제적인 맥락을 이해하고 과학기술 생태계와 연계된 사회시스템의 제도와 문화를 어떻게 변혁할 것인지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이 전개되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토론회에선 정작 사회혁신의 개념이 무엇이고, 왜 그것이 과학기술에서 중요하며, 무엇을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에 대한 구조적인 사고와 논의를 찾을 수 없었다. 정부와 몇몇 IT 업체가 추진하던 피상적인 사업에 대한 소개가 있었을 뿐이었다. 보다 못해 “여기 나온 사람들이 개념을 이해하지도 못한 채로 어떻게 갑자기 사회혁신을 구호 삼아 과기부의 정책을 추진하느냐”는 내 질문에, 국장은 허허 웃으면서 “아~ 우리는 그냥 공무원일 뿐이라서…”라고 말끝을 흐렸다.
과학기술 생태계의 문제는 일부 정부 기관 종사자들의 무지몽매함이나 무례함, 무책임성만이 아니다. 생물학자 김우재는 <과학의 자리>에서 한국의 과학기술 거버넌스와 문화가 경제 발전과 산업 활용에 경도된 관료 권위주의 체계에서 ‘중인’의 기능적 역할에 박제된 과학자들에 의해 재생산되어왔다고 지적한다. 교육과 과학기술 관련 리서치 혹은 컨설팅하며 목도한 바로는, 공대 교수들의 상당수는 인터뷰 할 때마다 “연구비가 더 필요하다. 우리를 대우해 달라. 박정희 때는 과(공)학자를 존중해 줬다”는 말을 반복한다. 그러나 본인들이 교육과 연구의 현장에서 무엇을 주도적으로 할 것이며, 산업 생산을 지원하는 일 외에 인류의 지식을 증진하고 사회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어떤 책임성을 가질 것인지에 대해 체계적으로 사고하거나 자신의 업무에 비추어 깊이 성찰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예나 지금이나, 지성적인 ‘중인’은 드물다.
실패가 예정된 반지성주의적 시스템
비지성(非知性)의 한계는 지식의 양이나 사회적 지위에 의해 극복되지 않는다. 과문한 필자는 지성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확답할 자신은 없다. 다만, 수백 년간 근현대 지식을 축적해 온 서구 사회에서 학자와 시민이 삶을 영위하는 모습과 한국의 현실을 비교하면서, 지식이 어떻게 추구되고 활용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오래 하게 되었다. 경험적으로 봤을 때, 지성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태도에 가까워 보인다. 그 태도에는 지식과 현실 사이의 접점을 메우고자 하는 진지함과 함께, 사적 권력이 아닌 공익을 추구하는 공적 정신(public mind)이 깔려있다. 지성은 지식을 매개로 세상의 진리를 발견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인간과 사물에 대해 체계적으로 고찰하면서, 사회 발전의 길 혹은 진리의 본질을 모색하고자 하는 지적 성향이 아닐까 싶다.
이런 지성은 개인의 성향이라기보단 근대화된 문명의 산물이다. 지성이 사회적인 효용을 발현하려면 지식 활동이 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이고 단편적인 지식을 전달하는 기능을 초월하여 공적인 울림을 가지는 메시지를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수많은 지적 활동은 그저 반복되는 행정작용을 정당화하는 논리 혹은 구호를 만들어내거나, 대중적인 흥미를 유발하는 지식 마케팅과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보다 순수하고 본질적으로 여겨져 온 학문 활동조차 관료적인 평가와 면피를 위한 논문 편수를 찍어 내고 학문 본연의 가치 추구보단 인용 지수(impact factor)가 높은 저널에 기계적으로 투고하는 기능적 노동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비지성적인 행위를 유발하는 시스템은 구성원들의 지성이 모자라서라기보단, 지성을 말살하거나 억압하는 반지성(反知性)의 권력, 게임의 룰이 사회 전반에 작용한 효과일 가능성이 크다. 교육을 포함하여 한국 사회의 지식 관련 활동은 학벌과 같은 지위재(positional goods)나 돈과 권력과 같은 기회 추구에 경도되어 있다. 정해진 게임의 틀 속에서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기능적으로 공부하거나 연구한 이들이 주로 권력의 매개 역할을 하는 사회에서, 본질에 천착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성찰성(reflexivity)과 리더십이 축적되긴 어렵다. 지위 추구 경쟁에 최적화되기 위해선, 쓸데없이 본질적인 맥락을 고민하지 말고 시스템에 순응하는 방법에 몰입하여 인정받는 게임의 기능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국내외의 명문대에 들어가기 위해 한국의 중상류층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는 온갖 기상천외한 편법이나 탈맥락화된 입시 공부로 점철된 무한노동은, 그런 전도된 지식 활동의 한 단편에 불과하다.
지식이 공적 이데아로부터 유리된 채 단순히 학벌 지위를 추구하는 수단으로 전락한 한국 교육체계야말로 가장 반지성적이다. 그 체제에 길들여진 채 다분히 진리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와 사적 권력 추구 성향이 내면화된 한국의 엘리트는 반지성적인 사회 풍조를 재생산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한국의 반지성주의는, 상대적으로 덜 배운 대중의 무지에 의해 촉발되기보단 그럴듯한 학벌과 유려한 말주변만 갖춘 쇼윈도 지식인의 피상적인 담론에 의해 확대될 개연성이 크다. 이런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지면, 미래 담론은 알맹이 없는 키워드로 채워지고 사회에 대한 성찰은 소수자에 대한 비난과 혐오로 대체된다. ‘우쭐한 당나귀가 이끄는 조용한 사자의 무리’와도 같은 집합적 우매함이 문화의 퇴행을 부추기고 사회를 벼랑으로 내몬다. 오늘날 목격되는 반지성주의 문화와 정치 거버넌스의 실패는, 지난 수십 년간 권력과 지식의 관계가 잘못 꿰어진 반지성주의적 시스템이 야기한 자연스런 귀결로 보인다.
한국의 반지성주의: 지식의 단편적 기능과 반지성적 엘리트 지배
역사학자 호프스테터는 <미국의 반지성주의>에서 반지성을 ‘정신적 삶과 그것을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의심, 지식인이 대변하는 정신적 삶의 가치를 얕보려는 경향’이라고 정의한다. 미국 사회가 건국 초부터 그러한 반지성주의 성향을 보이게 된 배경으로 유럽 귀족주의와 권력을 독점해 온 지식인에 대한 반감, 보다 평등한 사회에 대한 희구, 물질적인 성취에 대한 시민적 가치 부여, 토착 공동체의 삶을 관장한 청교도의 전통 등을 꼽는다.
윤석열 당선자는 취임사에서 “국가 내부의 지나친 집단적 갈등에 의해 진실이 왜곡되고,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을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해치고 있다”고 지적하고,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의 입장을 조정하고 타협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진실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필자는 과학이 대변해야 할 독립적이고 논리적인 사고 체계와 진실을 추구하는 지적 태도만큼 한국의 현실 속에서 낯선 것이 없다고 느낀다. 대중민주주의 정신의 일단이 반지성주의로 발현된 미국의 역사적 배경과는 반대로, 근현대 한국 사회는 독립적인 사고를 억압하고 지식 활동을 사회적 지위의 획득 혹은 권력의 작용을 위한 단편적 기능으로 축소한 편협한 엘리트 지배체제가 반지성주의를 조장해 왔기 때문이다.
진실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비웃고, 지성과 거의 무관한 활동으로 취득한 학벌이나 사회적 지위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면서 자신의 무지에 사회의 지적 활동을 꿰 맞추는 것만큼 반지성적인 행위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그러한 행위는 사회적 일탈이 아니라 지배 시스템 속에서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 체화한 전형적인 태도에 가깝다. 그 태도의 공통성 앞에서는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가 따로 없다. 이전 정부의 좌파 엘리트가 전문가를 경시하고 깊이 성찰해야 할 문제들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키워드만 수사적으로 활용하면서 세상을 다 아는 듯 의기양양했다면, 현 정부의 우파 엘리트는 학벌이나 해외 수상 등 형식적인 인정체계에 과도한 가치를 부여하고 대중을 경시하는 표현을 통해 자신의 ‘엘리트성’을 뽐내고자 할 개연성이 없지 않다. 지식을 단편적인 기능으로 이해하고 본인들이 취득한 사회적 ‘라벨’을 지성으로 오해한다는 점에서, 일견 상이한 한국 정치 주체들의 반지성주의는 공통된 뿌리를 갖고 있다. 대한민국의 지배 세력은 몇 차례의 교체를 경험했지만, 근본적으로 대동소이한 반지성주의의 틀 속에서 대중을 동원하고, 경멸하고 있다.
수년 전부터 한국 사회의 전문가들은 데이터 시대에 필요한 증거 기반 정책(evidence-based policy)이 한국에선 정책 기반 증거(policy-based evidence)가 되고 말았다며 자조적으로 웃는다. 사실, 어떠한 데이터나 정보든 확정적인 것은 드물고 연구자의 관점과 리서치 설계, 해석에 따라 다양한 현실을 비출 수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이 극단적인 상대주의에 면죄부를 주거나, 연구자의 주관을 배제하거나 무시해도 된다는 의미를 갖진 않는다. 세상을 비추는 수많은 스냅샷 중에서 불편하거나 본인의 관념에 맞지 않는 것이 있을 때, 지성적인 권력과 책임자들이 취해야 할 행동은 그 스냅샷이 주장되는 진실에 배치될 수도 있는 내재적인 가능성에 대해 정제된 논리체계를 통해 진지한 질문을 주고받는 것이다.
반면, 반지성적인 권력은 자신의 이데올로기와 다른 시그널을 대놓고 무시하거나 억압한다. 마치 내가 이미 정답을 알고 있고, 너는 그럴듯한 구실이나 지식으로 포장된 결과물만 가져오면 된다는 듯. 그러한 사고방식과 태도로 점철된 사회, 조직, 인물은 본원적으로 불완전한 지식과 정보의 한가운데서 최선의 가능한 판단과 선택을 쌓아나가는 역량을 키울 수 없다. 껍질의 안쪽에선 고정관념에 갇힌 이데올로기와 수사가 한동안 반복될 수 있지만, 그 시스템의 껍질은 외부의 갑작스럽고 파괴적인 변화에 취약하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지성이 결여된 리더십과 대중 정신이 외부 변화의 본질을 통찰해서 파국을 회피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본질과 무관하고 정치 팬덤 사이에서나 민감할 ‘예송논쟁’으로 세월을 보내고 외침의 풍전등화 앞에서 당파싸움을 일삼았던 전근대사회의 악몽은, 여전히 극복되지 못한 한국적 반지성주의의 그림자이다.
조직화된 반지성을 넘어서: 생각하는 시민들의 성찰적 거버넌스
지식으로 포장된 반지성주의가 한국 사회에서 작동하는 풍경은 익숙하게 반복된다. 그런 지식은, 맥락적 숙고와 논리적 검증이 아닌 외부의 권위를 동원한다. 요란한 키워드가 반복되고, 출판물이 쏟아진다. 정부의 자금이 몰려들고, 동떨어진 일을 하던 사람과 조직들이 전문가, 전문기관으로 등장한다. 토론 없는 공청회가 열리고 신기술에 대한 맹목적인 상찬이 이어진다. TV에는 명문대 교수와 해외 명문대 출신 사업가가 주로 얼굴을 들이민다. 최근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이 작동하는 방식은 기대의 버블을 최대한 키우는 것이기에, 정부-산업계-언론-대학이 혼연일체가 되어 담론과 투자의 거품을 만들어낸다. 다수의 사람이 생각 없는 불나방처럼 몰려들다 그들의 삶마저 물거품이 되면 어떡하냐고? 그때는 루나 코인을 만든 대표의 일갈을 상기하는 것이 좋다. “Ask your mom”(네 엄마에게 징징대)
일을 하는 척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과, 대중을 호도하는 담론을 통해 영향력을 획득하고 돈을 끌어모으는 사람들의 공모관계가 실질적인 부가가치를 창출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행여 ‘세금 뤼팽’처럼, 납세자들을 잘 속여서 모은 돈의 극히 일부를 좋은데 쓰는 사업가 혹은 지식인 도둑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런 공모의 악순환을 끊어내는 방법으로 사법적 응징이 통하리라 기대하기도 어렵다. 반대로, 응보의 칼자루를 쥔 이들이 합법적인 부패의 일원으로 합류하는 사례가 많았다. 그러니 이후라도 사회시스템에 지성이 탑재된다면, 일단 멈추고 질문부터 하는 것이 좋다. 지금 떠드는 것들의 본질적인 개념이 무엇인지. 그리고 미래를 섣불리 설파하기 전에, 우리에게 놓인 현재의 본원적인 문제는 무엇인지.
필자는 현재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가 ‘조직화된 반지성’이라고 생각한다. 지성적이지 않거나 지성에 반하는 이들에게 지식을 관장할 권력이 부여되고, 심지어 그들은 자신이 지성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권력이 지식의 우위에 있고 지식이 교조화된 권력에 봉사하던 전근대-권위주의 사회의 유습이 청산되지 않은 환경에서, 사람들은 그저 학벌에 목을 매고 지식 활동은 겉과 끝만 맞춰 이루어진다. 그런 문화와 시스템 속에서 학문적 호기심이나 진지한 탐구, 엄밀한 분석과 성찰이 설 자리는 협소하다. 지식을 매개로 한 차별의 외양을 갖춘 사람들이 그저 군림하려 하기 쉽다.
사회학자 김종영은 미국 유학생들의 생애주기에 대한 질적 연구를 수행한 <지배받는 지배자>에서 ‘열등생’의 경험을 체화한 주변부의 지식인이 어떻게 ‘학벌 인종주의’에 기대어 얄팍한 지식 마케터로 거듭나는지를 보여준다. 박권일이 <한국의 능력주의>에서 지적하듯, 문제의 근원은 단순히 시험을 능력으로 착각하는 테스토크라시(testocracy)가 아니라, 순수한 능력이 온전히 개인의 특질이며 그로 인한 차별은 당연하다고 믿는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유사 인종주의에 있다. 정유라가 ‘돈도 실력이야, 없으면 니네 부모 원망해’라는 말을 해서 공분을 샀지만, 사실은 ‘나의 실력도 부모나 돈, 혹은 주변 환경 덕’일 수 있다는 사실에 겸손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사회적인 상식 아닐까. 구성원들 사이에 그런 두려움이 공유되고 있지 않다면, 그만큼 ‘능력’은 사회적 차별과 착취를 정당화하는 핑계로 작용하고 있을 개연성이 크다.
국가 내에서 사유의 탁월함과 평등한 민주주의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가 침잠된 사회를 혁신하기 위한 주요한 화두가 될 것으로 내다본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피상적인 대립에 휘말리는 대신, 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시민층을 앞으로 어떻게 형성할 것인지에 대해 중지를 모아야 한다.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 깊이 생각할 여유를 가지면서 중요한 의사결정의 장에 참여해야 한다. 그 빈자리가 클수록, 공론장은 얄팍한 지식 마케터나 경세가를 자처하는 자의식 과잉의 꼰대들로 들어찰 것이다. 지성이 결여된 교육시스템, 지식리더십이 부재한 거버넌스에 대한 반성이 미래의 리더에게 극복의 길을 제시하길 염원한다.
Leo Kim ARS Praxia CEO
leo_kim@arspraxia.com